왜 유능했던 여자일수록 육아하면서 더 무너질까

왜 유능했던 여자일수록 육아하면서 더 무너질까

제 얘기부터 할게요.

저는 방송작가로 10년을 일했어요. KBS, MBC, SBS… 마감에 쫓기고, 방송이 나가고, 크레딧에 제 이름이 올라가는 그런 삶이요. 그런데 아이를 키우면서, 어느 날 그 10년이 통째로 휴지조각처럼 느껴졌어요.

그래서 식당 설거지 알바를 알아봤어요.

“방송작가’씩’이나 했던 사람이 왜?” 하실지도 모르겠는데요. 그때 저는 진심이었어요.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거든요. 근데요. 그 설거지 알바마저 떨어졌어요.

그날 자존감이 어디까지 내려갔는지 아세요? 땅바닥이요. 바닥도 아니고 땅속이요.

“아, 나는 이제 끝났구나.”

혹시 지금, 이 문장이 남 얘기 같지 않은 분 계세요?

10년, 15년, 20년을 일한 분들이 저를 찾아와요. 은행에서 창구를 지킨 분,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 분, 미국에서 박사까지 한 분, 병원에서 20년을 버틴 간호사. 경력이 없는 분이 없어요. 오히려 다들 대단한 걸 이미 갖고 있어요.

그런데 하나같이 이렇게 말해요.

  • “제가 뭘 잘하는지 모르겠어요.”
  • “저는 특별한 게 없어서요.”
  • “이 나이에 뭘…”

이상하죠? 그렇게 많은 걸 해온 사람들이 왜 자기 앞에만 서면 이렇게 작아질까요.
저는 이게 오랫동안 궁금했어요. 그리고 이건 우리가 나약해서가 아니에요. 진짜예요. 파고들어 보니까, 우리 같은 사람이라면 거의 반드시 도착하게 되는 자리더라고요. 왜 그런지, 오늘 하나씩 풀어볼게요.


하나, 우리는 ‘칭찬받던 세계’에서 갑자기 벗어났어요

방송작가로 일할 때 저는 매일 검증받았어요. 마감을 지키면 방송이 나가고, 이름이 뜨고, 반응이 돌아왔어요. 매일매일 세상이 저한테 “너 쓸 만해”라고 말해준 거예요.

그런데 육아는요. 하루 종일 온몸이 부서지게 일해도 남는 게 안 보여요. 마감도 없고, 크레딧도 없고, “잘했다” 소리 하나 없어요.
10년을 매일 칭찬받던 사람이, 어느 날 칭찬이 0인 세계로 이사 온 거예요. 문제는 제 능력이 아니었어요. 저를 지탱하던 그 ‘인정받는 구조’가 육아 세계엔 아예 없더라고요.

둘, 이건 정상적인 격변인데, 아무도 안 알려줬어요

사춘기 아시죠? 아이가 어른이 되는 그 요란한 시기. 우리는 사춘기가 힘든 걸 당연하게 여겨요.

그런데요. 엄마가 되는 것도 그만큼 큰 격변이래요. 심지어 이름도 있어요. 사춘기가 adolescence라면, 엄마가 되는 이 전환은 matrescence(매터레센스), ‘모성으로의 전이’라고 불러요. 한 사람의 정체성이 통째로 뒤집히는 시기라는 거예요. 이 말은 1973년 다나 라파엘 박사(Dana Raphael, Ph.D.)가 처음 사용했다고 합니다.

“중요한 전환기를 놓친 것은 성숙기, 즉 어머니가 되는 시기입니다… 출산이 자동으로 어머니를 여성으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어머니가 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공부가 필요합니다.”

The critical transition period which has been missed is matrescence, the time of mother-becoming…Giving birth does not automatically make a mother out of a woman…The amount of time it takes to become a mother needs study.
— Dana Raphael, Matrescence, Becoming a Mother, A New/Old Rite de Passage (1975)

출처: https://www.matrescence.com/

그런데 세상은 이걸 인정을 안 해줘요. “엄마 됐으니 행복하지?” 한마디로 덮어버려요. 그러니까 우리는 정상적으로 흔들리는 시기를 지나면서도, “왜 나만 이러지? 나만 이상한가?” 하고 자기를 탓해요.
아니에요. 원래 흔들리는 시기예요. 당신만 그런 거 아니에요.

셋, 슬퍼할 수조차 없는 상실이라서 더 아파요

제 커리어는 죽은 게 아니었어요. 그런데 살아있지도 않았어요.
이게 제일 잔인해요. 확실히 끝났으면 실컷 슬퍼하기라도 할 텐데, “언젠가 돌아갈 수도 있잖아” 싶으니까 슬퍼할 자격도 없는 것 같은 거예요. 상실인데 애도를 못 하는 거죠. 그래서 처리가 안 된 채로 계속 마음에 매달려 있어요. 무너짐이 끝나질 않는 거예요.

넷, 밑바닥에서 한 번 더 떨어지면 뇌가 포기를 배워요

여기가 제 설거지 알바 이야기예요.

방송작가 10년이 휴지조각이 된 것도 서러운데, 식당 설거지 알바마저 떨어졌을 때 — 그때 제 머릿속에 딱 심어진 게 있어요. “이제 나는 뭘 해도 안 되는구나…”

이게 그냥 기분이 아니래요. 통제할 수 없는 실패가 반복되면, 뇌가 아예 “노력해봤자 소용없다”를 학습해버린대요. 무기력이 습관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존감이 땅속까지 갔다는 건 과장이 아니라, 제 뇌가 포기를 다 배운 상태였던 거예요.
여기까지가 우리 마음 안에서 벌어진 일이에요. 그런데요. 진짜 무서운 건 그다음이에요. 우리 밖에, 사회에도 함정이 있었거든요.

다섯, 우리는 ‘돈으로 세는 습관’을 너무 잘 배웠어요

우리는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세상에 살아요. 얼마 버느냐로 사람 값을 매기는 거요.

육아는요. 돈이 안 돼요. GDP에도 안 잡히고, 무보수고, 심지어 “집에서 쉰다”는 소리까지 들어요. 그러니까 돈으로 가치를 재는 습관이 몸에 밴 사람일수록 — 그러니까 열심히 커리어를 쌓아온 유능한 사람일수록 — “돈을 못 번다 = 나는 무가치하다”로 자동으로 계산해버려요.

이게 역설이에요. 유능했던 사람일수록 이 병에 더 세게 걸려요. 자기를 시장 가격으로 재는 습관이 더 강하니까요.

여섯, ‘남들 다 가는데 나만 뒤처졌다’는 시계

사회엔 보이지 않는 시계가 있어요. “몇 살엔 뭘 해야 한다”는 시간표요. 거기서 벗어나면 “낙오”라고 도장을 찍어요.

한국 여성 취업률 그래프가 M자 모양인 거 아세요? 30대에 뚝 떨어졌다가 나중에 다시 올라오는. 통계로 보면 그냥 곡선이지만, 그 골짜기 안에 있는 사람한테는 “나만 뒤처졌다”는 낙인이에요. 특히 방송작가처럼 프리랜서는 한 번 나가면 자리가 사라지고 대체돼요. “잠깐 쉰다”가 순식간에 “영영 끝났다”가 되는 거죠.

일곱,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 구조가 만든 문제를 우리가 뒤집어썼어요

돌봄을 맡아줄 곳이 없는 것, 한 번 나가면 못 돌아오는 노동시장, 돌봄은 여자가 해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 이거 전부 우리가 만든 게 아니에요. 사회가 만든 문제예요.

그런데 이 세상은 참 교묘해요. 그 구조적인 실패를 이렇게 번역해요.
“네가 노력이 부족해서. 네가 관리를 못 해서. 네가 못나서.”

시스템이 우리를 벼랑으로 밀어놓고, 떨어진 우리가 “내가 뭐라고” 하면서 자기를 탓하게 만드는 거예요. 무너진 책임이 구조에서 나한테로 슬쩍 넘어와요. 이게 “이제 나는 끝났다”의 진짜 핵심이에요.


그러니까, 이건 당신 탓이 아니에요

다시 정리해볼게요.

당신이 무너진 건, 당신을 매일 칭찬하던 세계가 통째로 사라졌고, 원래 흔들리는 격변인데 아무도 정상이라고 안 알려줬고, 슬퍼할 자격도 없는 상실을 계속 안고 있었고, 밑바닥에서 한 번 더 떨어져 뇌가 포기를 배웠고, 거기에 “돈으로 나를 재는 습관”과 “나만 뒤처졌다는 시계”가 얹혔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 이 모든 구조적인 결함을, 세상이 당신 개인의 잘못으로 뒤집어씌웠기 때문이에요.

당신의 나약함은 이 어디에도 없어요.

당신은 게을러서 자기 걸 못 꺼내는 게 아니에요. 당신은 ‘시장이 세는 방식’으로만 자기 가치를 재도록 훈련받았고, 그래서 시장이 세지 않는 당신의 진짜 자산이 안 보이는 것뿐이에요.

당신은 끝난 게 아니라, 꺼내는 법을 아직 안 배운 거예요

저는 그 땅속 바닥에서, 제 경험을 하나씩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했어요. 마치 기자가 타인을 취재하듯이, 저를 취재한 거예요. 시장이 안 세는 제 10년을, 세상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하나하나 번역하기 시작했어요.

그랬더니요. 휴지조각인 줄 알았던 그 10년이, 사실은 창고에 쌓여만 있던 보물이었더라고요. 꺼내는 법을 몰랐을 뿐이었어요.

그 방법 이야기는 다음에 더 할게요. 오늘은 이거 하나만 두고 가고 싶어요.

당신, 안 끝났어요. 아직 안 꺼냈을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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